익성공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자격이 있었으므로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할 때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썼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을 구별하지 않고 떠들고 장난을 쳐도 조금도
꾸짖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뽑고 뺨을 쳐도 내버려 두었었다.
일찍이 아랫관리를 불러 일을 의논하며 책에 글씨를 쓰고 있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량(德量)은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눈을 책에서 떼지 않았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져서 눈이 어두웠으나, 자서(字書:옥편)의 음의(音義)와 편방(偏旁:한자의 왼쪽과 오른쪽을 통틀어 이르는 말)과 점획(點劃)을 백에 하나라도 그릇되게 쓰지 않았다.
<< 筆苑雜記, 필원잡기 >>
조선 초 황희 정승하면 꼭 순탄한 삶만을 살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이성계의 간청으로 조선을 위해 일하면서 청렴결백하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옥고도 치르지만 결국 세종의 가장 큰 신임을 얻어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여보게!
자신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평등하게 바라보며 원만한 인품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세.
그러면서도 시문(詩文)에 뛰어 날 수 있음은 쉬운일이겠는가.
매사에 외유내강하는 자세를 견지한 것임을 알아야 할걸세.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바르고 원만하게 가꾸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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