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는 진유(眞儒)이며, 임금을 도와서 큰일을 할만한 인재로서
높이 등용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지우(知遇)를 가장 두터이 받아, 여러 번 그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태조가 같이 승진하게 하여 재상이 되었다.
문충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여러 공신들과 함께 몸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
(社稷)을 붙들려 하였다.
그때 태조의 공과 업적은 날로 왕성해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려, 형세가 남의
신하로 그치기는 어렵게 되었으므로 문충공은 그를 꺾을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저버리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무고한 모함을 받게 되면 몽주는 죽음으로써 우리를 변명해 주겠지만, 만약 나라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다.” 하였다.
문충공의 마음과 형적[心跡]이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그를 초청하고 술을 권하며 노래(하여가)를 지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
문충공도 이 답하며 술잔을 보내면서 노래(단심가)를 불러 응수하였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태종이 문충공의 뜻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결국 제거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문충공이 하루는 태조의 집에 병문안을 가서 그 기색을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옛날의 술친구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인은 외출하고 뜰에는 꽃이 활짝 피어있었는데,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마시고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오늘은 날씨가 몹시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몇 대접의 술을 마시고 나왔다.
그 집 사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는데 얼마 안 되어 문충공이 해를 입었다는 말이 들렸다.
문충공이 태종의 집에서 돌아올 때 그 앞을 가로 질러 지나가는 활을 멘 무부(武夫)가 있었다.
문충공이 따라오는 녹사(錄事 의정부 벼슬아치)를 돌아보며, “너는 뒤에 떨어져라.” 하였다.
녹사가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니 재삼 꾸짖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문충공이 살해를 당할 때 서로 끌어안고 함께 죽었는데, 그 당시 창졸간에 그 녹사의 성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후세에 이름을 전하지 못하였다.
<< 海東樂府, 해동악부 >>
고등학교시절 배웠던 너무도 유명한 시조라 모르는 이들이 없을정도로 잘 알고들 있을게다.
태종 이방원이 하여가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 보자, 단심가로써 굳은 충절의 의지를 내비침으로
써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포은 정몽주의 충절도 높이 사야하겠지만, 그의 곁에서 죽음을 같이 한 부하 역시 대단히
충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보게!
죽음앞에 태연할 수 있고,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 포은과 창졸의 죽음을 돌이켜보며 , 최근의 독도 영유권, 쇠고기 30개월령 수입문제, 폭등하는 국제유가 속에서 휘청대는 국가 경제등을 온 몸으로 지켜내려는 공복들이 있는지 생각케 된다.
포은과 사육신 같은 충신들이 죽음으로써 나라(고려)를 지키는데는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의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들이 후손들의 가슴과 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있음을
명심하고 나랏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숨쉬고 있는 나라.
그리고 내 자식과 후손이 아름답게 가꾸어 갈 나라.
나도 대한민국의 이름앞에 언제나 떳떳한 국민으로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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