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때 문도공 윤회(尹淮)와 집현전 학자 남수문(南秀文)은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술을
좋아함이 지나쳐 임금은 그들을 아끼는 마음에 술을 석잔이상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로 이들은 연회에서 술을 마시게되면 석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 크기가 말술이었다.
세종이 이말을 듣고는,
“내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이른 것이 오히려 술을 더 권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한번은, 윤회가 술에 만취하여 누워있는데, 입금이 입궁하라고 이르매, 아직도 술이 깨지않아
주변 내시들이 모두 걱정하는데, 임금앞에 이르러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임금의 교서를 나는 듯
붓을 휘들러 쓰니, 모두가 임금의 뜻에 맞은지라......
임금이 이르기를, “참으로 처재로구나.” 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창성(文昌星)과 주성(酒星)의 정기가 모여 한 현인(賢人)을 낳았다.”라고 하였다.
<< 筆苑雜記 , 필원잡기 >>
윤회의 일화는 <거위와 구슬>이라는 설화로도 유명해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날 젊은이가 시골의 한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옷차림이 하도 허름해 주인장이 방으로 들지
못하도록 하자, 문밖에 앉아 있었는데....
주인집 아이가 진주를 마당에서 가지고 놀다 떨어뜨리자, 옆에 있던 거위가 꿀떡 삼켜버렸다.
이에 주인장이 아무리 찾아도 진주가 없자, 옆에 있던 윤회를 묶어 다음날 관아로 이송하려 하였다.
그러자, 윤회는"저 거위도 함께 내곁에 묶어 두시요."하였고.......
다음날 아침 거위의 똥속에서 진주가 나오자, 주인장은 미안한 마음으로 사죄하며,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 어제 저녁 그리 말하였다면 당신은 저 거위의 배를 자르고 진주를 찾았을 것이고, 나는 그런 거위가
죽지 않을까 걱정되어 아침까지 기다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문장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너그럽고 자애로운 성품이 있었기에 세종의 총애를 받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또한, 죽어서까지 임금이 제사를 내려줄 만큼 아꼈던데에는 그의 재능과 인간됨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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