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나를 돌아보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섬돌 2008. 2. 14. 09:28

 

 

  여헌 장현광 선생은 인동에 살았다.

 

 선생께서 일찌기 마당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마루 위로 보리를 거두었다. 선생께서는 연로한데다 얼굴빛이 검고 옷도 몹시 허룸해 촌늙은이 같았다.


  이때 도백의 아들이 비를 피하러 들어와 마루 가운데 방자하게 앉더니 무례하게 묻는것이었다.
  
"보리타작한 것이 적지 않으니, 당신도 곡식을 좀 먹는 것 같군."
  "힘들여 거두면 겨우 배고픔이나 면할 수 있지요."
  

  귀밑살에 금관자(金貫子)가 붙어 있는 것을 보더니 도백의 아들이 다시 물었다.
 

  "납속(곡식을 나라에 바침)한게 아닌가?"
  "근래 당상관 품계를 주는 일이 매우 많았던 까닭으로, 이 시골사람 역시 붙이고 있지요."
 

  또 아들이 있느냐고 묻자 답하였다.
  
  "양자가 있지요."
 

  집에 있느냐고 묻자 선생께서 대답했다.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갔지요."
 

  무슨 일이냐고 묻자
  
  "부학(副學) 일을 하고 있지요."
 

  그때에 공의 아들이 부학이 되었으니 이름은 응일(應一)이었다.
  그런데 또 묻는 것이었다.
 

  "여헌 장선생께서 이 고을에 계신데, 혹시 알고 있지 않소?"
  "근처 소년들이 나를 여헌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백의 아들이 이 말을 듣고서는 놀라고 당황해 하더니 마당으로 내려가 서서 말하였다.
  
  "소생이 어리석어 선생께 죄를 지었습니다."
 

  벌받기를 청하자 선생께서는 그로 하여금 마루에 오르도록 권하고서 훈계하기를
  
  "선비는 말을 삼가야 하네. 다음부터 그러지 말게나."
 

  그 뒤에 도백이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아들을 가르치지 못한 죄를 사죄하고 그 아들을 혼내주려고 했다. 선생께서 애써 말리자 이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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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속이 차고 여물면 겸허해 진다.

 설익은 과일은 아무리 겉보기가 좋을 지라도 떫거나 제 맛이 나지 않듯, 허울만 좋은 이들은

인덕이 부족하고 깊이가 없다.

 

 여보게!

 자네는 얼마나 익은 과일인가?

 자신의 위치와 그릇됨을 돌이켜 보는 오늘이 되면 어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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